뱃속에서 함께 로스쿨을 다닌 딸과, 단상에 올랐다
3월 20일. 오늘은 딸아이의 생일이다.
매년 이 날을 조용히 혼자 넘기곤 했는데, 올해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태어나기까지의 이야기를, 오늘 한 번쯤은 제대로 꺼내봐야겠다고.
‘10년 기자, 변호사.’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이력일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누구보다 느린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매 고비마다 꼭 한 번은 넘어졌고, 남들보다 한 박자씩 늦게 도착했다.
대입부터 그러했다. 현역으로 인서울 하위권 대학에 합격했다가, 부모님 몰래 반수해서 이화여대에 들어갔다. 거기서 2학년을 마칠 무렵, 할아버지 간병을 하던 병원 복도에서 컴퓨터에 동전 500원을 넣고 편입 공고를 보았다. 합격해서 3학년부터는 연세대에서 공부했다. 한 번에 간 사람들과 결과는 같았지만, 오는 길은 한참 달랐다.
취업도 마찬가지였다.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수십 번 탈락했다. 그나마 가진 ’글쓰기’라는 재주 하나로 기자가 됐다. 그런데 기자가 되고도 한동안은 그 타이틀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기자생활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7년차쯤. 그 즈음에야 이런저런 언론상을 받았고, 인사고과에서 최고점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36살. 늦어도 너무 늦은 나이에 남들은 하나도 어렵다고 하는 두 가지 도전을 동시에 시작했다. 로스쿨과 시험관 시술.
1학년 1학기 형법 시험에서 4점을 받았다. 꼴찌였다. 시험관 일정이 기말고사와 딱 겹치기도 했다. 헌법 시험을 마치고 강남차병원으로 달려가 배아이식을 받았는데, “한 시간 누워있으라”는 의사 말을 무시하고 바로 민법 시험을 준비했다. 아등바등 버텨낸 그 시술은 비임신으로 끝났다. 열람실에서 입을 틀어막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2학년 1학기엔 아이를 낳았다. 24시간 진통 끝에 응급 제왕절개수술을 했고, 수혈을 두 팩이나 받았다. 그 몸으로 출산 한 달도 안 되어 중간고사를 치렀다. 따뜻한 봄날인데 복숭아뼈가 깊게 시리던 그 증세가 ’산후풍’이었음은 나중에야 알았다.
잊을 수 없는 ’큰 사고’는 3학년 때 터졌다. 돌 지난 아이가 집에서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2도 화상이었다. 아이와 함께 2~3주간 병원에 입원한 채로 3학년 1학기를 보냈다. 자퇴를 생각했던 때였다. 지금은 흉터 없이 다 나았지만, 그날 아이의 벗겨진 살가죽을 보며 한없이 죄책감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매 고비마다 꼭 한 번은 넘어졌고,
남들보다 한 박자씩 늦게 도착했다.
그럼에도 졸업은 했다. 그것도 65명 중 6등으로.
법전은 구경도 못 해본 채 입학해 꼴찌로 시작한 내가, 시험관-출산-육아를 병행하며 독종같이 버텨 얻은 결과였다.
졸업성적 상위 10등 안에 든 학생에게만 허락되는 단상에, 나는 뱃속에서 함께 로스쿨을 다녔던 딸아이와 손을 잡고 올랐다. 수석 졸업생보다 더 큰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졸업식 단상에서, 뱃속에서 함께 로스쿨을 다닌 딸과.
오늘 내가 이 지루하고 찌질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쓴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모두가 아이를 로스쿨의 걸림돌이라 했지만, 그 산을 넘게 해준 힘도 결국 아이에게서 나왔다. 좌충우돌 실수 많았던 내 인생에 찾아와, ’워킹맘 변호사’라는 빛나는 이름을 안겨준 딸아이의 생일을 나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축하받고 싶었다.
둘째. 졸업식 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학생 때만큼 열심히 산다면, 법조인 인생도 성공적일 것이라고. 로스쿨 3년만큼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한다. 과정이 증명했고, 결과가 증명했다. 나 혼자만 알고 있던 이 3년의 이야기를 이제는 세상에 꺼내놓고 싶었다. 그때의 열정 그대로 지금도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열정적이고 실력 있는 변호사를 찾고 있다면, 저 여기 있습니다.>
아이 생일 핑계로, 주책맞게 한번 손들어봤다.
이 글은 2026. 3. 20. 링크드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