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 계약 읽기(3) 주금을 넣고 나면 물릴 수 없다

일러스트 생성: Google Gemini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돈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납입기일은 3주 뒤다.
이 3주 동안 회사는 어떤 상태에 놓이는가. 투자자가 마음을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반대로 회사가 다른 투자자를 만나 조건을 다시 협의하고 싶어지면.
그리고 3주가 지나 돈이 들어온 다음에는.
도장 찍는 날과 돈 들어오는 날은 다르다
투자에는 날짜가 두 개 있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날, 그리고 투자금이 회사 계좌에 들어오는 날. 실무에서는 앞의 것을 사이닝(Signing), 뒤의 것을 클로징(Closing)이라 부른다. 표준계약서는 뒤의 날을 거래완결일이라 쓰고, 인수가액 전액이 납입된 날로 정의한다.
왜 하루에 다 하지 않는가. 서명하는 시점에는 아직 갖춰지지 않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관을 고쳐야 하고, 주주총회나 이사회 결의를 거쳐야 하고, 인허가가 필요한 사업이면 관청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 이런 절차는 도장 찍는 날 한꺼번에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계약서는 이렇게 설계된다. 먼저 조건을 적어 두고, 그 조건이 다 갖춰지면 돈을 넣는다. 그 조건들을 선행조건이라 한다.
납입기일까지 갖춰야 할 여덟 가지
1. 회사 및 이해관계인이 본 계약에 따라 이행하여야 할 의무를 이행하였을 것
2. 회사 및 이해관계인이 본 계약에서 행한 진술과 보장이 진실되고 정확할 것
3. 본 계약에 따라 투자자가 인수하기로 예정된 본건 신주의 발행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등 본 계약의 이행을 방해하는 소송 또는 기타의 절차(행정절차, 감사 등 포함)가 진행 중이거나 진행될 우려가 없을 것
4. 회사가 본 계약의 이행과 관련하여 필요한 정부의 인허가 등을 획득하였을 것
5. 회사가 본 계약의 이행과 관련하여 필요한 제3자의 동의 등을 획득하였을 것
6. 회사가 본 계약의 이행과 관련하여 필요한 관련 법령의 절차(상법 제418조 등) 및 회사 내부 절차(정관 및 내부규칙 변경, 주주총회결의, 이사회결의 등 포함)를 이행하였을 것
7. 회사가 투자자의 동의없이 정관 및 내부규칙을 변경하거나 투자자와 협의 없이 이사회 결의, 주주총회결의를 하지 않았을 것
8. 회사가 본 계약의 체결 이후 자본구조, 경영상태, 재무상황의 통상적이지 않은 변동 내지 부정적 변동, 통상적인 영업활동에서 벗어난 행위가 없을 것
여덟 개를 성격별로 묶으면 셋이다.
첫째는 회사가 해야 할 절차다. 4호, 5호, 6호가 여기 해당한다. 인허가를 받고, 필요한 제3자의 동의를 받고, 상법과 정관이 요구하는 절차를 밟는 일이다. 6호가 언급하는 상법 제418조는 주주가 아닌 사람에게 신주를 발행할 때 정관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다. 정관에 제3자 배정 근거가 없으면 주주총회를 먼저 열어 정관부터 고쳐야 한다. 여기서 일정이 밀리는 회사가 많다.
5호의 “제3자의 동의”도 가볍지 않다. 회사가 은행에서 돈을 빌렸거나 대형 거래처와 계약을 맺었다면, 그 계약서에 주주 구성이 바뀔 때 상대방의 동의를 받으라는 조항이 들어 있을 수 있다. 투자 논의를 시작하는 시점에 기존 계약서들을 한 번 훑어봐야 하는 이유다.
둘째는 회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호와 8호다. 도장 찍은 뒤 돈 들어올 때까지 회사를 크게 흔들지 말라는 뜻이다. 투자자는 실사에서 확인한 상태를 전제로 기업가치를 계산했으니, 그 사이에 회사가 달라지면 계산이 무너진다.
문제는 8호의 표현이 넓다는 데 있다. “통상적이지 않은 변동”, “통상적인 영업활동에서 벗어난 행위”가 어디까지인지 계약서만 봐서는 알 수 없다. 스타트업은 원래 변동이 큰 조직이라 평소 하던 일도 여기 걸릴 수 있다. 대규모 채용이 통상적인 영업활동인지, 새 사업라인을 여는 것이 통상적이지 않은 변동인지, 이 3주 동안은 조심하는 편이 낫다.
셋째는 계약의 기본 전제다. 1호와 2호, 3호가 여기 들어간다. 이 중 2호가 무겁다. 실사 과정에서 회사가 한 진술과 보장이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내용은 4편에서 따로 다룬다.
그 사이에는 계약을 깰 수 있다
이 3주 사이에만 열려 있는 문이 하나 있다.
1. 일방 당사자가 본 계약에서 정한 의무를 위반하거나 제3조에 따른 진술과 보장 사항에 허위 또는 오류가 발견되어 상대방으로부터 통보를 받았으나 이를 5일 이내에 이를 치유하지 아니하는 경우
2. 선행조건 불충족 기타의 사유로 거래완결이 20[ ]년 [ ]월 [ ]일까지 이루어지지 아니하거나 선행조건이 충족될 수 없는 것이 확실해진 경우
② 본 조에 의한 계약 해제 시 귀책사유 있는 당사자는 상대방에게 그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여야 하고, 이와는 별도로 상대방이 지출한 모든 비용(회계실사 비용, 법률실사 비용 등 전문가 자문료를 포함)을 보전하여야 한다.
법이 정해 준 해제권이 아니라 당사자가 계약으로 만들어 둔 해제권이다. 민법이 정한 해제 사유와는 별개로, 계약서에 적어 둔 사유가 생기면 행사할 수 있다.
읽을 때 눈여겨볼 곳이 셋이다.
5일. 문제를 통보받고 5일 안에 고치지 못하면 상대방이 계약을 깰 수 있다. 진술·보장에 오류가 발견된 경우까지 포함하니, 5일은 짧을 수 있다.
빈칸으로 남은 날짜. 2호의 날짜가 최종기한이다. 이날까지 거래가 완결되지 않으면 계약을 깰 수 있다. 통상 계약 체결 후 1~3개월로 적는다. 이 날짜가 없으면 회사는 투자자가 결정할 때까지 무한정 묶여 있게 된다. 회사에도 필요한 장치다. 투자가 무산될 것이 분명한데 계약에만 묶여 있으면 다른 투자자를 찾을 수 없다.
비용 보전. 계약이 깨지면 잘못한 쪽이 손해배상과 별도로 상대방이 쓴 비용을 물어 준다. 회계실사, 법률실사 비용이다. 여기에는 상한이 없다.
주금이 들어오면 문이 닫힌다
납입기일이 지나 돈이 들어왔다. 주식이 발행되었다. 이제 회사가 진술과 보장을 어긴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자. 투자자는 계약을 해제하고 투자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가.
없다.
일반적인 계약이라면 해제하고 원래 상태로 되돌리면 된다. 물건을 돌려주고 돈을 돌려받는 식이다. 그런데 주식 투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주금이 납입되면 그 돈은 회사의 자본금이 된다. 자본금은 회사와 거래하는 사람들이 믿고 보는 숫자다. 두 당사자가 합의했다는 이유로 자본금을 되돌리면, 그 사이에 회사와 거래한 제3자들이 다친다.
이것이 자본충실의 원칙이다. 회사법은 회사를 두 사람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여러 이해관계인이 얽힌 단체로 본다.
그래서 상법은 주금이 납입된 뒤에 계약을 뒤집는 길을 좁혀 두었다. 회사가 성립한 뒤에는 주식을 인수한 사람이 청약서의 요건이 빠졌다는 이유로 무효를 주장하거나 사기·강박·착오를 이유로 취소하지 못한다. 신주 발행으로 인한 변경등기를 한 날부터 1년이 지난 뒤에도 마찬가지이고, 그 주식으로 주주권을 행사한 경우에도 같다.
요컨대 주금이 들어간 뒤에는 원상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주장이 여러 겹으로 막힌다.
그럼 방법이 아예 없는가. 하나 있다. 신주발행 자체를 무효로 돌리는 소송이다. 다만 상법은 이 소송을 신주발행일로부터 6개월 안에 제기하도록 못박아 두었고, 법원은 웬만한 하자로는 받아 주지 않는다. 대법원은 신주발행을 사후에 무효로 하면 거래의 안전을 해칠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무효 원인을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보면서, 회사법의 기본원칙에 반하거나 기존 주주의 이익과 경영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정도라야 무효로 볼 수 있다고 판시해 왔다(대법원 2009. 1. 30. 선고 2008다50776 판결 등).
정리하면 이렇다. 주금 납입 전에는 계약을 깰 수 있고, 그 후에는 사실상 어렵다. 납입 전에는 아직 자본금이 되지 않은 돈이라 자본충실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길이 만들어졌다
투자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돈을 넣은 뒤에 회사가 약속을 어겼다. 해제는 안 된다. 그러면 투자금은 어떻게 돌려받는가.
여기서 계약서의 구조가 갈린다. 국내 투자계약서에는 두 가지 방식이 섞여 쓰여 왔다. 하나는 계약을 해제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주금 납입 전에는 해제로, 납입 후에는 주식매수청구권과 위약벌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개정판은 뒤쪽을 택했다. 앞쪽은 방금 본 이유로 납입 후에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준계약서에서 해제 조항은 SPA에 있고 거래완결일 전으로 한정되는 반면, 투자금 회수 장치는 SHA에 주식매수청구권과 위약벌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들어가 있다.
2편에서 본 분리형 구조가 여기서도 보인다. 돈이 들어오기 전의 이야기는 SPA, 들어온 뒤의 이야기는 SHA다. 주식매수청구권과 위약벌이 실제로 어떻게 계산되는지는 10편에서 다룬다.
거래완결일에 회사가 할 일
돈이 들어온 다음 날부터 회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신주를 발행하고 주주명부를 고친다. 투자자에게 주권을 준다. 주권을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면 주권미발행확인서로 대신한다. 납입영수증과 변동사항이 반영된 주주명부 사본도 함께 준다. 그리고 거래완결일로부터 2주 안에 자본금 증가 등기를 마친다.
여기는 협상할 것이 없는 조항이다. 그렇다고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돈만 받고 주주명부 정리나 등기를 미루면 다음 라운드를 받을 때, 정기주주총회를 열 때, 투자자가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할 때 줄줄이 혼선이 생긴다.
본 편에 뒤이어 나올 4편에서는 선행조건 제2호가 말하는 진술과 보장을 본다. 실사 자료실에 올린 문서와 미팅에서 한 대답이 어떻게 계약의 일부가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 무엇이 따라오는지를 다룬다.
협상 테이블에서
선행조건과 거래완결 전 해제는 둘 다 유의해서 봐야 하는 조항이다. 회사에 큰 부담을 지우는 쪽은 아니지만, 조건과 기한을 어떻게 적어 두느냐에 따라 계약을 이행하는 과정이 달라진다.
해제 조항에서 회사가 조정을 시도해 볼 만한 곳은 넷이다.
해제 사유를 좁히는 것. 계약서는 해제 사유를 “의무를 위반하거나 진술·보장에 허위 또는 오류가 발견된 경우”라고만 적어 둔다. 위반이나 오류가 얼마나 커야 하는지는 쓰여 있지 않다. 문구대로라면 실사 목록에서 소액 소송 한 건을 빠뜨린 것도 해제 사유가 된다. 그래서 회사는 중요성 기준을 넣자고 요구할 수 있다. 어떤 의무든이 아니라 중대한 의무를 어긴 경우로, 어떤 오류든이 아니라 회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오류로 한정하자는 것이다.
치유 기간을 늘리는 것. 5일이 짧다고 판단되면 10일이나 15일로 연장을 협의할 수 있다.
회사도 해제권을 갖는 것. 투자자의 해제권만 적혀 있는 계약서가 있다. 균형상 회사도 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할 필요가 있다.
비용 보전에 상한을 두는 것. 실사 비용 보전액이 일정 금액을 넘지 않도록, 또는 투자금액의 몇 퍼센트를 넘지 않도록 한도를 정해 둘 수 있다. 협의하려면 실사에 얼마가 들지 미리 가늠해 두어야 한다.
최종기한은 1~3개월로 적는 경우가 많다. 회사가 인허가나 정관 변경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정해야 하고, 여유가 없으면 그 자체가 해제 사유가 된다.
오늘의 체크포인트
- 계약서에 도장 찍는 날과 투자금이 들어오는 날은 다르다. 표준계약서는 뒤의 날을 거래완결일이라 부르고, 인수가액 전액이 납입된 날로 정의한다.
- 선행조건 여덟 가지는 회사가 밟을 절차, 회사가 삼갈 행위, 계약의 기본 전제 셋으로 나뉜다. 정관에 제3자 배정 근거가 없으면 주주총회부터 열어야 한다.
- 기존 계약서에 주주 구성이 바뀔 때 상대방 동의를 받으라는 조항이 있는지 투자 논의 초기에 확인한다.
-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기간은 거래완결일 전까지다. 치유 기간 5일, 그리고 계약서에 적는 최종기한이 그 문을 여닫는다.
- 주금이 납입되면 자본충실의 원칙 때문에 원상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주장이 여러 겹으로 막힌다. 주식인수의 무효 주장과 취소가 제한되고, 신주발행무효의 소는 6개월 제척기간에 걸리며 법원은 엄격하게 판단한다.
- 그래서 납입 후의 회수는 해제가 아니라 주식매수청구권과 위약벌로 설계된다.
- 거래완결일로부터 2주 안에 자본금 증가 등기를 마쳐야 한다.
관련 조문 전문 보기
② 회사는 거래완결일의 다음날에 본건 신주를 발행하여 주주명부에 변동 사항을 기재하고, 다음 각 호의 서류를 투자자에게 교부하여야 한다.
1. 본 계약에 의한 주주권을 표창하는 주권. 단, 주권을 발행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면 주권미발행확인서.
2. 본건 신주의 인수가액의 납입영수증
3. 변동사항이 반영된 주주명부 사본
③ 회사는 거래완결일로부터 2주 이내에 자본증가의 상업등기를 이행하고, 법인등기부등본, 기타 본 계약상의 주식 인수를 적법, 유효하게 하는 것으로서 투자자가 요청하는 자료를 투자자에게 교부한다.
이 글은 「창업자를 위한 벤처투자 계약 읽기」 연재의 3편입니다.